


“ 네 녀석 사정따위 내 알 게 무어더냐. ”

庇夜
비야
15892세|206cm
외관 나이 30대 중반



흑과 백. 하얀 것과 검은 것. 새하얀 도화지 위에 튄 먹물을 보는 듯한 존재.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괴이. 드높은 산 위에 내려앉은 만년설처럼 새하얀 장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나부끼는 결이 썩 부드럽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며 그 안에 빛을 발하는 홍채며 온통 하얗기만 한데, 살짝 덮인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이는 세로로 찢어진 푸른 동공만이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이었다. 더불어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탓일까 좀처럼 그에게서 생기라곤 찾아보기 힘겨운 것에 가깝다. 그 위로 지어지는 표정 또한 대부분 무기질적이니 보는 이로 하여금 이질적인 느낌을 받게끔 하는데에 일조한다.
얼핏 보기에는 꽤나 신경써서 의태한 것으로 보이나 인간과 달리 끝이 뾰족한 귀를 보아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하기야 그런 것을 중요히 여기었다면 약 7척(尺)에 가까운 장신으로 의태하진 않았을 것이다.




환력


영귀환몽 (映鬼幻朦)
달빛에 비친 鬼에게 현혹되어 앞이 흐려지다.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이미 명줄이 다 한 령을 다루는 능력.
학유의 끝자락. 깊은 산등성이 언저리에 자리 잡은 묘터의 신령이 지닌 신력은 이승에 떠돌아다니는 혼령을 마주하고 천도薦度하는 힘이었다. 신력으로 불러들인 혼령은 제 혼을 붙들어둘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온전한 형체를 맺지 못하여 현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하는 것이 일반적. 허나 이 괴이는 자신의 신력에 황룡에게서 받은 환력을 더하여 이들이 형체를 갖게하매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할 수 있게끔 돕는다. 이 상태를 ‘계약’이라고 칭하며, 부름 당한 령은 이 괴이의 일시적인 권속이 되어 계약을 이행한다. 령들은 그들이 이승을 떠돌기 위해 미약하게나마 붙들고 있는 생기를 살아있는 것들에게 전하여 신체의 회복을 돕기도 했으며, 때로는 마수를 베어낼 수 있는 검의 형태가 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이 말하기를 마치 꿈결과도 같다 하여 작금과 같은 명칭을 갖게 되었다.




보제


백사 白蛇
자신의 본 모습을 빼닮은 뱀의 형태.
본 모습과의 차이가 있다면 보제는 정반대의 색을 띈다. 크기 조절이 자유로워 원래 지내던 터가 아닌 곳으로 이동할 경우 크기를 줄여 데리고 다닌다.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이나 실질적으로 ‘생명체’는 아니다.




성격


태양이 지고 달이 떠오를 때에
어둠이 산등성이를 넘어오고 싸늘히 식은 공기가 주변을 맴돌아
맞잡았던 두 손이 식어갈 즈음엔
달빛 아래서 똬리를 튼 뱀 한 마리가 네 발치에 있으니-
나긋하고 차분한 / 관조적인 / 여유로운
조곤조곤한 목소리, 여유 넘치는 몸짓. 조급할 일도 없고 언성 높일 일도 없다. 모든 일에 하나하나 안달복달하며 갈피를 잡지 못할 나이는 이 괴이에게 있어서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평온한 낯으로, 그저 관망하며 지켜볼 뿐이다. 성급하게 굴지 않으니 큰일에 휩쓸리는 일이 없고, 언성을 높이지 않으니, 괜스레 얼굴 붉힐 일이 없다. 필요에 의해서만 행동으로 옮긴다. 가만히 때를 기다리다 보면 언제가 되었든 원하는 것을 제 손에 쥘 수 있다 여겼으니 그에겐 급히 갈 이유가 없다. 애닳을 이유도 없다. 그야 당연하다. 이미 세상만사 겪을 만큼 겪은 장생종의 태도일 뿐이다.
집요한 / 직설적 / 악질적 / 영악한
저런데도 불구,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어느샌가 그 대상에 대한 기이한 집착을 드러낸다. 딱히 주변의 평을 신경쓰지는 않는 모양이나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그 대상을 찾는 것 조차도 어려운 일인지라 좀처럼 그 면모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그 대상이 괴이 혹은 인간이라면 결국 당해본 이만 치를 떠는 상황이 펼쳐지는 셈. 처음에는 당하는 이는 당하는 줄도 모른다. 그저 조용히, 은밀하게 상대를 막다른 길에 몰아넣는 몰이 사냥을 펼칠 뿐. 이 괴이에게 있어서 먹잇감의 반응이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쩐지 유쾌하구나.’ 라는 단순 명료하고 순수한 목적. 그렇기에 더욱이 당하는 입장에서는 악취미로 느껴질 뿐이다. 뭐, 정작 이 영악한 뱀은 그마저도 즐기는 듯 하지만.
뻔뻔한 / 오만한
자신이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라는 자각 정도는 있다. 통상적으로 칭해지는 ‘착한 심성’의 범주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자신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는 귀찮고,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이미 수천해, 아니 만 해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면전에 대고 거친 비난과 삿대질을 해대어도 뻔뻔하게 뒤집어쓴 가면과 그 속에 든 고약한 심보는 나날이 견고해져만 간다. 한 꺼풀 벗겨내면 두 겹을 덮어쓰는, 고집스런 가면극. 그리하여 입 밖에 내는 것은 불만이면 내 위로 올라서거라, 한 번쯤은 듣는 시늉이라도 해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오만하기 짝이 없는 고압적 태도.
달아나렴, 달아나렴.
우리 함께 달이 차오를 때까지
끝나지 않을 술래잡기를 하자구나.




기타


一. 기원과 탄생
아주 먼 옛날 창현이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제대로 된 문명이라고 말하기도 난색한 것들이 즐비하던 시기에 북쪽의 끝자락에 자리한 설산 하나. 산길이 험하고 혹독한 추위에서 살아남은 드센 들짐승들이 많아 한 번 발길을 들이면 돌아 나오기 힘들다 하여 근방에 살아가는 이들은 命失道 라 칭했다. 척박한 땅 위에 삶의 터전을 꾸린 이들은 특히나 같은 고도의 설산들에 비해 비교적 따스운 기운이 고여있는 양지바른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산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안녕을 기리기 위해 시신 없는 묘터를 지었고 그곳에 자리잡은 뱀 다섯 마리가 살았다. 사람들은 이 다섯 마리 뱀들을 무덤가의 수호령으로 여겼으며 그들 중 두 번째로 부화한 것이 비야이다. 제일 먼저 부화한 알로부터 삼백여 해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二. 신력
나고 자란 곳이 무덤가인 탓일까? 다섯 마리 뱀들은 모두가 비슷한 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공통적으로 령과 귀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 중 비야의 영안이 다른 이들에 비해 특출난 편이었다. 다만 처음으로 부화한 (엄밀히 따지자면 첫째라고 할 수 있는) 세호(稅護)를 주축으로 신앙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그들 사이에서 세호 이상의 무언가를 행하지 않기로 은연중에 합의를 보았다. 때문에 실상 드러나는 비야의 신력은 령을 볼 수 있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도 그 이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현재는 그들이 올바르게 천도할 수 있게끔 이끄는 것까지 행하고 있다.
三. 무덤가의 다섯 뱀?
그렇다면 이 괴이가 태어나 황룡이 바뀌기를 인간의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 손으로는 모자라 두 손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 땅 위에 창현 苍炫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고, 그들의 터전이 자리하고 있는 북쪽을 학유라 칭하게 된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명실도는 학유 내에서도 인적이 드물었고, 이제는 단 한 마리의 뱀만이 무덤가를 지키고 있다.
이미 제 형제들은 누군가는 비승하여 천계로 향하였고, 누군가는 명실도를 떠나더니 대요괴가 되었다는 풍문이 들려오지를 않나, 또 하나는 장생이 지겹다 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 낙화하더니 기어이 회복하지 못하고 생의 끝을 맞이하였다. 개중에 가장 골칫거리를 꼽자면 네 번째로 부화한 아우일진데, 오래 전 저 설산 깊은 곳 방벽과 인접한 곳에 틀어박혀 요괴로 화한 채로 칩거중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을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뱀이라고는 비야 홀로가 되었다. 그리 지내게 된 지도 어느 덧 약 이천백 해가 되어간다.
四. 신령? 요괴?
그리하여 작금의 이 괴이가 무엇인가 하면 어찌 되었던 신령이다. 본래 신앙이란 형체가 없으면 쉬이 바래는 것이나, 이 수호령들은 신도들의 눈앞에 버젓이 현존하니 어디 그럴 수 있나. 일찌감치 공덕을 쌓아 비승해도 한참 전에 비승했어야 했을 괴이가 자신들이 지켜오던 터전을 보전해줄 이를 찾지 못 하였다 하여 여태 창현의 땅에 발딛을 수 있음은 이 뱀이 북부의 추위를 피해 대략 삼백 해에서 오백 해 사이의 수면 주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기질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내킬 때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어지는 순간까지 명실도를 떠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신도 수가 줄어들었고, 쌓아온 공덕 역시 소멸되어 갔다.
五. 호중천
호중천 소집에 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볼 수 있다. 천령이 호중천을 처음 소집하기 시작했을 시기에 그는 한창 수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 약 사백 해 전쯤 활동기로 돌아온 괴이는 부득이하게 의태를 풀고 제가 몸담고 지내오던 터전에 침입한 마수와 엉겨들었고, 그 영향으로 인하여 주변 일대에 산사태를 일으키는 등의 소란을 피워냈다. 그러나 환력조차 지니지 못한 신령이 무슨 수로 마수를 물리쳐냈겠는가? 불운인지 천운인지 핵만큼은 온전히 지켜내었으나 기껏해야 마수를 장벽 바깥으로 몰아낸 것이 전부였으며 이후 꼴사납게 시름시름 앓다가 낙화하여 제 몸을 수복해낸 것이 고작 이백 해 전이다. 따라서 이번 소집이 두 번째 되시겠다.
六.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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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이어온 기간이 방대한 탓일까, 그간 맞이해온 숱한 수면기동안 반복해온 탈피의 영향으로 의태를 푼 본 모습은 그 길이와 덩치, 하물며 무게까지 쉬이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가 의태를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들은 얼핏 산 꼭대기에 하얗게 쌓인 만년설로 착각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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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이 뱀이다보니 추위를 꽤 타는 편이다. 그런 것 치고 옷차림은 가벼운 편에 속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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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는 애연가이다. 묘터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사당은 그가 피워낸 연기로 자욱하여 제 아무리 신도들이어도 사당 안으로 출입하길 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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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의태하였어도 뱀은 뱀. 체온이 낮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