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의 뜻이 곧 소인네의 뜻인지라…. ”


塗說
도설
332세|236cm
외관 나이 20 - 30세



따지자면 그 신령의 외형을 정의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며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육체는 때로는 순록의 형상으로, 때로는 새의 형상으로 나타났으나 오래 유지되는 일이 없었으니, 나타나는 이의 공통된 특징을 말하자면 불안정하게 일렁이며 금방 허물어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는 신체,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 대신 달려 있는 탈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필요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사람 비슷한 꼴을 갖추고는 있었다. 구불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은 바닥에 끌리듯 길었으며 긴 소매 사이로 얼핏 비치는 흰 피부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일렁였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나무로 깎은 듯한 모양의 탈이 있었는데, 탈의 모양과 표정은 시시때때로 변했다. 제 몸의 일부가 아닌 푸르고 흰 빛의 의복은 길게 끌리되 끝자락이 희미하게 비쳤는데, 종종 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해 꼬리나 알 수 없는 신체 부위 따위가 의복 아래로 길게 끌렸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이상하리만치 호리호리하고 큰 키와 어울리지 않게도 자세는 영 당당하지 못하고 구부정했으며, 걷는다기보다는 흡사 미끄러지거나 둥둥 뜨는 것처럼 움직였으니, 꼭 사람 아닌 것이 사람 거죽을 뒤집어 쓴 듯하여 딱히 호감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래 보고 있자면 무시무시하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는데, 이는 특유의 온화한 분위기와 종종 가면 뒤에서 울리는 맑은 웃음소리, 그리고 상대를 살피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사려깊은 태도가 필시 영향을 끼쳤으리라.




환력


언중유골(言中有骨)
목소리에 기원을 담아 대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환력. 즉, 일종의 언령이다.
의지 실린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도설이 어떠한 뜻을 담았느냐에 따라 요력이나 신력, 심지어는 환력이 강해지기도 하고, 몸이 가벼워지고 날래지기도 하며, 고통을 덜어내고 상처가 회복되기도 한다. 언중유골은 때로는 도설 자신에게조차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목소리에 실리는 기원으로는 대체로 긍정적인 의지만을 담을 수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마수에 대해서는 마수를 멸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을 수 있었다. 이 목소리를 들은 마수는 의지의 종류에 따라 바람으로 베인 듯한 상처가 나거나 내상을 입는 등 다양한 방식의 피해를 입는다.
하나. 목소리에 담을 수 있는 의지의 내용은 환력의 방향성을 결정할 뿐 절대적인 위력이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을 결정짓지는 않았으며, 오직 환력의 한도 내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저 이가 낙화를 겪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아 목소리를 내어도 동료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낙화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저 마수를 반드시 멸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도 마수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을 뿐 정말로 마수를 멸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이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해도 대상은 그저 예전처럼 몸 상태만 개운해졌으며, ‘고향으로 바로 순간이동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 봐야 자신의 발만 빨라지고 말았다.
둘. 목소리에 아무리 의지를 많이 담는다고 해도 듣는 이에게 힘을 전달할 뿐, 듣는 이의 마음이나 방향성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저 이가 여기에 있는 바위를 없애줬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담는다면, 듣는 이가 바위를 잘 부술 수 있도록 힘을 강하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바위를 부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듣는 이의 의지였다. 심지어는 듣는 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힘조차도 전달할 수 없었으니, 바위나 물 등 순수한 자연물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셋. 의지와 목소리는 영원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담긴 의지가 희박해지면 희박해질수록 언중유골의 힘도 약해졌으며, 의지는 여전하더라도 목소리가 멈추면 영향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목소리와 의지를 모두 놓지 않더라도 환력의 한계가 온다면 언중유골은 평범한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특히 마수에게 상처를 입히는 쪽보다는 아군을 치유하거나 돌보는 쪽의 환력 효율이 더 좋았는데, 의지의 내용이 절대적인 환력의 위력을 정하지 못할 뿐이지 의지의 크기는 상대적인 위력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즉, 도설은 기본적으로 마수에 대한 적의보다는 아군에 대한 호의를 기반으로 의지를 담았으니 치유나 아군 보조에 더욱 적합한 환력이라 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힘의 한계가 있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다수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지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적어질수록 의지의 힘은 더욱 커졌으니 무턱대고 모두에게 언중유골을 사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 도설은 목소리에 자신의 신력을 더했다. 도설은 신력으로 소리와 얕은 산들바람을 조율할 수 있었는데, 대상에게 들을 의지만 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든 신력의 범위 안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다른 목소리와 섞이지 않도록 도설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빚었다. 의지를 담은 노래는 도설의 힘이 닿는 범위라면 어디든지 닿을 수 있었으니, 크게 집중하는 탓에 신력의 범위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이 아닌 이상 듣는 이의 위치는 도설에게 있어 큰 제약이 아니었다.




보제


술이 달린 탈 형상의 보제
모양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주로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얼굴을 모방한 일반적인 목각 탈 형태를 가지며 얼굴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크기이다. 도설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언제나 탈이 있었다. 탈은 도설에게 있어 불안정한 육신이 흩어지지 않도록 심적으로 돕는 심상 내지는 매개의 역할을 했다. 즉, 도설은 굳이 보제를 쓰고 있지 않아도 육신을 어찌저찌 고정할 수 있긴 했으나 심리적인 영향 탓에 보제를 썼을 때보다 불안해하고, 또한 육신이 조금씩 흩어지는 일이 더욱 잦았다.
보제는 도설이 보여주고 싶은 표정과 희로애락을 대신했다. 웃음을 보이고 싶을 때는 활짝 웃는 탈을, 슬픔을 나타내고 싶을 때는 한껏 일그러진 탈을 내비친다.




성격


[희미한 자아]
“소인네의 호오를 물어 봐야 아무 의미가 없사옵니다.”
대부분 남의 의견에만 따르고 반박은 가뭄에 콩 나듯 하며 제 의견을 먼저 피력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꼭 자아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타인이 웃으면 같이 웃고, 타인이 울면 같이 울었다. 심지어는 말투조차 일관성이 없게 오락가락하니 혹자는 ‘자꾸 휩쓸리지만 말고 네 의견을 말해 보라’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더라. 하지만 도설은 ‘소인네는 그저 흘러가고 존재할 뿐이라’ 하고 일축하며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었으니 상대로서는 퍽 답답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의지]
“이곳에 남아 있어도 괜찮소?”
비록 자아 없는 이마냥 굴었으나 도설은 정말로 자연물 같은 자는 아니었다. 드물지만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있었고, 남을 위로하거나 대화를 먼저 시작할 줄도 알았으며 목소리에 담아낼 의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만 골라냈다. 혹자는 이 점을 지적하며 도설에게서 자아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설은 자신의 소망은 스쳐간 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며 목소리는 옛 연緣들의 흔적, 의지는 더 절박한 이들의 것을 전할 뿐이니 이는 자신의 오롯한 의지가 아니라 답한다. 하지만 도설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결국 그 모든 의지와 뜻을 실행하는 대상이 도설 자신이었고, 특히 마수에 대해서는 자아 없이 타인의 의견에 묻어가는 평소와는 다르게 의외의 적극성을 보였으므로 이래저래 궤변으로만 들릴 뿐이다.
[온화함]
“경, 바람이 찹니다.”
친분이 있든 없든 상대를 챙기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성미는 의지라기보다는 습성에 가까웠다. 비록 자아라 부를 만한 것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노를 표현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으며, 특별히 시끄럽게 굴지 않았고 남을 배려하며 움직일 줄 알았다. 기본적으로 이타적이고 사려깊은 천성을 타고났으니 나서서 적을 만드는 부류는 아니었다.
[낮은 자존감]
“소인네는 어디에도 없나이다.”
스스로의 자아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행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문제는, 이러한 점을 아무리 지적해도 도설은 계속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태도를 고수한다는 점에 있다. 자기 자신에게 가치를 매기지 않으며 주변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되레 ‘이만큼 확고한 자아가 또 어디에 있나’ 싶을 정도로 답답한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생각이 자기연민이나 도를 넘는 의존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점일까. 이 주제에 대해 대화가 지나치게 반복될 경우에는 말을 돌려버린다.




기타


1. 기원
학유의 설산 깊은 곳에 터를 잡고 사는 계(癸)라는 이름의 인간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사람이 살 수 있나 의심이 가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산을 타며 어떻게든 연명했다. 비록 부유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벌목과 채집, 그리고 이따금은 사냥을 통해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갈 수 있었으니 구성원들간의 유대는 굉장히 끈끈하였으며, 지리적인 특성상 외부의 위협과 맞닥뜨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갑작스레 눈이 쏟아지는 험악한 산속 날씨와 너무 빨리 내리는 어둠 탓에 길을 잃는 상황이었다. 실질적인 위험에 처한 이들이 온갖 짐승이나 위험천만한 산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빌고, 또한 제 가족과 이웃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던 신앙이 설산의 자연에 깃들어 신령이 되었는데, 이가 도설이다. 도설(塗說)은 진흙길 위의 이야기로, 일반적으로는 뜬소문을 뜻하는 단어이다.
2. 혼돈과 마주하기 전
도설에게는 큰 욕심도 야망도 없었다. 비승은 고사하고 딱히 강한 힘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니 신도를 돌보는 이유는 신앙을 모으거나 강해지기 위해 공덕을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아가 강하지 않았으니,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대로 부족의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이 안전하게 산을 오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도설의 전부였다. 도설은 자신을 위해 지어진 신당에 주로 머물렀으며, 부족원이 길을 잃었을 때는 목소리로 인도하거나 직접 모습을 드러내 길을 알려주었다. 날씨가 너무 궂은 날에는 약한 바람이나마 일으켜 눈보라가 조금이라도 상쇄될 수 있도록 힘썼다. 이렇다 보니 부족원들도 도설을 단순한 신앙과 경외를 넘어서서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했고, 도설도 그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아꼈다―비록 이러한 평화가 이어졌던 300여 년 동안에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3. 혼돈, 그 이후
혼돈에게 규칙이 있다면 그것이 어찌 혼돈일 수 있으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마수는 예외 없이 도설이 돌보던 부족에게도 찾아왔다. 소리와 미약한 바람만을 다룰 수 있는 도설의 신력만으로는 마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불안정한 도설의 육신으로는 마수의 공격을 대신 받아내도 뒤에 있던 사람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으니, 이에 부족민들은 무참히 쓰러져 갔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은 없었고, 도설은 도설답지 않게도 필사적으로―혹은 부족민 중 누군가의 의지를 받들어서―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민을 지키기 위해 무력감을 느낀 채로 계속해서 노래했다. 나름대로의 수를 던졌으나 몸 성한 부족민이 얼마 남지 않을 무렵에야 도설은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리기는 했으나 노래를 공명시켜 눈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 마수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겠지만 마수를 피해 도망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도설은 성하지 못한 몸으로 어떻게든 부족민을 챙겨 터전을 버린 채로 하산했다. 이때 입었던 상흔으로 인해 도설의 신체는 예전보다 더욱 불안정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이후, 살아남은 부족민은 인근의 다른 마을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심각한 후유증이 남은 이들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으니, 살아서 산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수두룩했다. 도설은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들을 신력만으로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제서야 힘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살아남은 부족민의 수는 겨우 스무 명 남짓이었으니 험한 설산으로 돌아가 부락을 형성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고, 애초에 재건이 불가능해진 탓에 설산의 마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부족민들은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이후의 삶은 새로운 마을에서 눈칫밥을 먹어 가며 알아서 잘 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니, 평소의 도설이라면 그 의지에 따라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족할 일이었다.
4. 호중천
하지만 그답지 않게도 작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분했다. 부족민들이 처한 상황은 모두 자신의 나태함과 안일함이 불러일으킨 결과인 것처럼 느껴졌다. 힘을 잘 모아두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으리라 여겼다―이는 결국 자존감을 더욱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 자아 없는 자가 품은 유일한 의지는 결국 이 후회로부터 기인한다. 모든 일이 터진 뒤 뒤늦게 하사받은 환력은 분에 넘치도록 강한 힘이었다. 환력을 사용하면 더는 마냥 무력하지 않았고 후유증이 남은 부족민까지 치유하고 돌볼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여기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의 환력만으로는 부족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이후, 황룡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호중천이 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했다. 세계가 질서를 되찾고 마수가 줄어들면 더는 부족민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겠지. 더 강해지면 부족민들에게 조금 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렇게 고향을 되찾아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한 생각들이 어느덧 비어 있던 자아를 채웠으니, 정작 진정으로 돕고 싶었던 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산에 묻혔으나 이들에게 가지 못한 환력은 그들의 친구, 후손, 이웃에게 새 터전을 주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신력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바람이나 소리를 전달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신력이 미치는 범위 내의 소리라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바람과 소리는 물리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따른 채로 전달된다. 소리에 대해서는 큰 제약이 없지만, 바람은 산들바람 정도의 약한 바람 정도만 다룰 수 있으며 공격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만큼 능숙하게 다루지를 못한다.
육신
음식을 반드시 섭취할 필요가 없으며, 바람이나 먼지처럼 흩어지고 이내 재구성되는 독특한 육신을 가졌다. 정확히는 ‘실체가 희미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는데, 이대로는 다른 존재와의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어지간해서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로 제 모습을 정돈한다. 하지만 이를 완전한 형상으로 유지하기는 힘들었고, 지나치게 크거나 지나치게 작을수록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써 본 세월이 적으며 상흔의 영향도 있어서, 순록 같은 동물이면 몰라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영 어려워했으니 지금의 사람 형상은 그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실체가 희미할 뿐 없는 것이 아니니, 공격을 받는다면 그 부분의 육신이 산산히 흩어지며 사라졌으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거나 치유를 받으면 수복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공격을 계속 받으면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점점 더 줄어들어서 종국에는 핵만이 남아 낙화하게 되니 내구성이 좋다고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여담으로, 도설은 아직 낙화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며 일생일대의 위기라 해 봐야 마수와 마주쳤던 순간뿐이었다.
목소리
평소에는 바람이 속삭이는 듯 조곤조곤하고 성별과 연령이 특정되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어조도 어투도 계속해서 변화했고, 어쩌다가 속삭임이 아닌 육성 섞인 목소리를 내도 언젠가는 노인의 목소리, 언젠가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 또 어느 날은 건장한 남성의 목소리로 변했으니 그의 목소리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는 환력을 사용하며 노래를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담아내는 의지나 곡조에 따라 자유자재로 목소리를 변화시켜 곡조를 뽑아냈다. 나름대로 목소리를 고르는 기준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물어본다면 말을 돌린다.
상대를 부르는 호칭은 늘 '경'이고, 자신을 칭하는 호칭은 언제나 '소인네'다.
호불호
경이 좋아하는 것이 곧 소인네의 호, 경이 싫어하는 것이 곧 소인네의 불호라고 이야기하지만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다. 자아가 희미하니 호오도 없다고 하기에는 어째 동료들이 고통받는 꼴을 잘 두고 보지 못하고, 아이들을 본다면 곧잘 어울려주며, 달달한 음식을 자꾸 탈의 안쪽으로 가져가는 것이 영 이상했다. 게다가 엉망인 곡조를 듣거나 날씨가 더우면 탈에 드러난 표정이 매우 무표정해지니, 글쎄, 정말로 호불호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