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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하여 이러느냐 물으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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塗說
도설

432세|2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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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 신령의 외형을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며 허물어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는 육체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 한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산짐승이나 사람의 형상을 갖출 수 있었다. 구불구불거리는 머리칼은 바닥에 끌릴 듯 길었으며 짙고 어두운 색의 도포자락 아래에는 차마 사람의 것이라 부를 수 없는 산짐승의 신체 부위가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미끄러지듯 소리 없는 걸음걸이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참, 왼쪽 손목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팔찌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가? 종종 발소리 대신 허리춤의 노리개에서 청아한 방울 울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100년 전과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형태를 견고하게 고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이전처럼 탈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내부가 꼭 비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탈이 얼굴 전체를 덮지 않을 때도 있었다. 도포자락 아래로 비치는 이상한 기관들도, 소매 아래의 기이하리만치 흰 피부도 그가 원한다면 일렁이지 않고 제 형체를 온전히 유지했다. 조금 작아지긴 했어도 인간이라 여기기 힘들 만큼 호리호리하게 큰 키는 여전했으나 굳이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인상은 100년 전보다 더욱 나빠졌다. 온화한 분위기도, 탈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웃음소리도 여전했으나 속내를 종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탓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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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tbie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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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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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유골(言中有骨

목소리에 기원을 담아 대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환력. 즉, 일종의 언령이다. 

 

의지 실린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도설이 어떠한 뜻을 담았느냐에 따라 요력이나 신력, 심지어는 환력이 강해지기도 하고, 몸이 가벼워지고 날래지기도 하며, 고통을 덜어내고 상처가 회복되기도 한다. 언중유골은 때로는 도설 자신에게조차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목소리에 실리는 기원으로는 대체로 긍정적인 의지만을 담을 수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마수에 대해서는 마수를 멸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을 수 있었다. 이 목소리를 들은 마수는 의지의 종류에 따라 바람으로 베인 듯한 상처가 나거나 내상을 입는 등 다양한 방식의 피해를 입는다. 여담으로, 곡옥의 영향을 받아 100년 전보다 절대적인 위력과 범위가 강해졌다. 

 

하나. 목소리에 담을 수 있는 의지의 내용은 환력의 방향성을 결정할 뿐 절대적인 위력이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을 결정짓지는 않았으며, 오직 환력의 한도 내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저 이가 낙화를 겪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아 목소리를 내어도 동료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낙화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저 마수를 반드시 멸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도 마수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을 뿐 정말로 마수를 멸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이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해도 대상은 그저 예전처럼 몸 상태만 개운해졌으며, ‘고향으로 바로 순간이동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 봐야 자신의 발만 빨라지고 말았다. 

 

둘. 목소리에 아무리 의지를 많이 담는다고 해도 듣는 이에게 힘을 전달할 뿐, 듣는 이의 마음이나 방향성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저 이가 여기에 있는 바위를 없애줬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담는다면, 듣는 이가 바위를 잘 부술 수 있도록 힘을 강하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바위를 부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듣는 이의 의지였다. 심지어는 듣는 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힘조차도 전달할 수 없었으니, 바위나 물 등 순수한 자연물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셋. 의지와 목소리는 영원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담긴 의지가 희박해지면 희박해질수록 언중유골의 힘도 약해졌으며, 의지는 여전하더라도 목소리가 멈추면 영향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목소리와 의지를 모두 놓지 않더라도 환력의 한계가 온다면 언중유골은 평범한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특히 언중유골을 사용하는 도설의 기분이나 상태가 매우 중요했는데, 의지의 내용이 절대적인 환력의 위력을 정하지 못할 뿐이지 의지의 크기는 상대적인 위력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의 한계가 있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다수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지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적어질수록 의지의 힘은 더욱 커졌으니 무턱대고 모두에게 언중유골을 사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 도설은 목소리에 자신의 신력을 더했다. 대상에게 들을 의지만 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든 신력의 범위 안에서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다른 목소리와 섞이지 않도록 도설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빚었다. 의지를 담은 노래는 도설의 힘이 닿는 범위라면 어디든지 닿을 수 있었으니, 크게 집중하는 탓에 신력의 범위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이 아닌 이상 듣는 이의 위치는 도설에게 있어 큰 제약이 아니었다. 

 

다시 둘. 지금의 도설도 분명 아군에 대한 호의를 기반으로 환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마수에 대한 적의가, 어느 날은 아군에 대한 호의가 더 강했으며 그 기준이나 주기 따윈 없이 오직 즉흥적인 기분에 좌우되었으니 아군 입장에서 퍽 황당할 노릇이다. 이러한 탓에 실질적인 위력은 더 강해졌는데도, 정작 환력을 받고 보면 100년 전보다도 영 시원찮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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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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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달린 탈 형상의 보제

모양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주로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얼굴을 모방한 일반적인 목각 탈 형태를 가진다. 대체로 얼굴 전체를 뒤덮는 크기였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서 턱이나 눈 일부가 그대로 드러날 때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굳이 보제가 없어도 제 육신 정도야 쉽게 고정할 수 있었지만, 혹 누군가가 보제를 벗기려고 한다면 기분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형태를 전부 흩어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보제는 이제 도설이 보여주고 싶은 표정을 대변하기도, 대변하지 않기도 했다. 100년 전처럼 탈에 온전히 자신의 표정을 싣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의 일부를 구현하고 드러내는 식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다가도, 내키지 않으면 제 감정과 상관없이 탈의 표정을 바꿔버렸으니 무엇이든간에 전부 그의 심기에 달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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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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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형성

“경의 뜻은 반드시 소인네의 뜻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더는 자신의 의지와 자아를 타인과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으며 금기시하지도 않는다.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까지 자아에 잘 어우러졌는데, 고집을 부린다 해도 목표를 향한 집념에 가까웠지 마냥 떼를 쓰지는 않았다. 나름대로의 어른스러움도 갖추고 있었다. 비교적 잘 웃었고, 특정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전 호중천의 동료들도 제법 살갑게 대했다. 굳이 따지자면 장족의 발전이라 평할 수 있었다.
…일단은 말이다.

온화함?

“경, 몸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어요.”

얼핏 보기에는 100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습성에 가까운 이타심은 여전해서 기본적으로는 남을 배려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었다. 별 문제만 없다면 예전처럼 시끄럽지 않고 조용했다. 그런데…

변덕

“생각이 바뀌었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호의도 제멋대로, 악의도 제멋대로에 죽 끓듯 치고 올라오는 변덕이 참으로 문제였다. 온화한 듯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그놈의 변덕이 도는 순간 완전히 돌변했는데, 일관성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 타인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성적이지 못함은 물론이요 타고난 이타심마저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아 크고 작은 문제를 많이도 일으켰다. 

 

그래서 대체 무슨 변덕을 부리느냐 하면 늘 이런 식이었다. 약속 깨는 일이야 예사요, 어느 마을의 솟대 세우는 작업을 흔쾌히 도와주다가도 수틀리면 애써 세운 솟대를 죄다 꺾은 뒤 불지르지를 않나,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뜬금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를 않나. 어느 날은 심각할 정도로 손속이 잔인하게 마수를 대하다가도 또 다음 날은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히면서 토벌에 참여하는 점이 또 그랬다. 특히, 도와준답시고 나서다가 돌변하여 일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가장 곤란했다. 애초부터 도움을 거절하자니 이 때문에 수틀려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는데다, 변덕만 부리지 않는다면 100년 전처럼 온화하게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긴 했으므로 아예 백해무익한 건 또 아니었다.

 

심지어 이 발작적이고 충동적인 변덕은 밥 먹듯 빈번했고 그 정도도 천차만별인데다 기분마저도 손바닥 뒤집듯 달라져 버리니, 단순히 비위를 맞춘다고 해결될 게 아닌지라 따지자면 천재지변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천성까지 악하지는 않아서 생사가 걸려 있거나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에 대해서는 최저한도의 절제를 할 줄은 안다는 점 정도일까. 적어도 마수 토벌 중에 치료를 거부한다거나 하는 대형 사고를 칠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생명은 소중하다’, ‘마수를 몰아내고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다’ 같은 대전제는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어기지를 않으니 아예 통제불능의 괴물은 아니라 평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절제라기보다는 중대사에 변덕 부릴 마음이 안 들고, 내면의 본성을 파헤쳐 보면 타인에게 상처입히는 상황 자체를 딱히 즐기지는 않아 유지되는 선에 가까웠다. 

 

심지어는 이 변덕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기색도 딱히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길래 마음 가는 대로 했거늘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늘 응수하는데, 특유의 이타심마저도 억눌러버리는 이 변덕의 출처를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참 난감했다.

 

결론적으로, 이 변덕을 단순한 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정도가 심히 과했으나, 완전한 악으로 규정짓자니 그나마 사람 목숨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고 심지어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 부상자가 나타나면 치료까지 해 주는 기행을 벌였기에 그는 여러모로 아슬아슬하고 껄끄러운 괴이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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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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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옥

분명 고향의 재건을 위해 일곱 번째 호중천에 참여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애써 얻은 곡옥을 마을에 사용하는 대신 문자 그대로 제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이유를 물어 봐도, 어디 변덕이라도 부리지 않는 한  ‘그냥 그러고 싶었다’ 수준의 황당한 대답만이 돌아온다. 주변에서는 그놈의 변덕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고 여기는 눈치이다.

 

결국 곡옥은 마을 재건 대신 도설 자신의 힘을 키우는 데에 쓰이고 말았다. 그 결과, 육체에 가해졌던 상흔의 영향이 곡옥으로 상쇄되고도 남은지라 육체를 훨씬 견고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환력과 신력 또한 더욱 강해졌다. 

 

2. 계(癸)

일곱 번째 호중천 소집 이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고향의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부족원의 수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 상황만 허락한다면 마을을 새로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세를 불렸지만, 학유의 눈이 녹고 되찾아야 할 고향조차 어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리자 터를 버리고 모두 연청으로 대피했다. 다만, 이 모든 과정에서 도설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이 퍽 이상했다.

 

3. 신령?

변덕이 죽 끓듯 하는데다 크고 작은 소란을 몰고 오는 평소 행실에, 계의 중대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체 왜 아직도 신령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도설과 계의 관계가 아직까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도설은 계의 중대사를 건드리지 않을 뿐이지 계와의 교류는 유지하기는 했다. 다만 종종 들러 어떻게 지내는지를 확인하거나 소소하게 도움 줄 것이 있다면 손을 내미는 정도에 그쳤으며 계가 머무는 곳에 함께 정착하지 않았다. 계 또한 이러한 도설의 행보에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종종 도설이 변덕을 부려 난처하게 해도 계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도설 또한 계에 대해서는 변덕의 수준이나 빈도가 현저히 낮았다.

 

결론적으로 계로부터 기인한 도설의 신앙은 미약하게나마 남았는데, 이는 신령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남아 있기 때문에 주된 힘의 원천은 곡옥과 보제였다. 다만 대가 없는 신앙, 변덕스러운 신령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도설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거나 계에게 이변이 생긴다면 요괴로 화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 보아도 무방했다.

 

4. 거취

호중천 소집 직후에는 한동안 학유에 머무르며 주역을 제외한 각지에서 다른 괴이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던 모양이지만, 학유의 설산이 녹고 계들이 대피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딱히 거취를 정하고 살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는 오히려 도설에게는 독이 되었는데, 특유의 변덕 탓에 온갖 지역에서 평판을 말아먹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5. 변덕의 시작점 

호중천 소집 직후의 도설은 이렇게까지 지독한 변덕쟁이가 아니었다. 가끔씩 이유 없이 울적해하긴 했지만, 조금씩 깨어나는 자아를 받아들이며 자주성을 조금씩 길러 나가는 모습에서 지금을 떠올리기 어려웠을 테다. 이후 서서히 변덕이 생기나 싶더니, 학유가 녹아내리던 3-40년 전을 기점으로는 웬만한 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이 되어 있었다. 곡옥을 삼킨 것도 이 부근의 일이다.

호칭과 말투

여전히 자신은 소인네로, 타인은 경으로 지칭한다. 지금도 100년 전처럼 속삭임에 가깝게 말하지만, 자아를 인정하면서 한 말투를 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단, 변덕이 도질 때에는 스스로를 ‘나’로 칭했으며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났다.

여전히 상대의 말 일부를 따라하는 버릇이 있다. 자각한 이후로는 고치려고 갖은 애를 써 본 모양이지만 모두 실패했다. 지금은 방치하는 중이다. 

신력

곡옥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확실히 강해졌다. 먼저 신력이 미치는 범위가 늘어났다. 신력이 깃든 목소리를 듣는 방식 또한 바뀌었는데, 신력이 깃든 목소리와 노래는 귀가 아닌 머리나 가슴으로 듣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단, 산들바람을 다루는 힘은 100년 전과 큰 차이 없이 무의미했고, 신력보다 강한 의지로 소리를 거부한다면 억지로 듣게 할 수는 없었다.


 

호불호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호불호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제 호불호야 쉽게 말했지만 죽 끓는 변덕 탓에 뭘 말하든 금세 번복하니, 오늘은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하던 대상이 내일의 철천지원수가 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이야기하던 화제를 싫증내는 일도 심심찮게 많았다. 

확고하게 싫어하는 것은 더위. 그래서 주역 근처에는 발도 붙이지 않았다더라. 더 따져 보자면 마수를 증오하거나 싫어하는 빈도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횟수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팔은 그래도 안으로 굽는다더니 북부 쪽이나 부족에 대해 유감스러운 말을 한다면 변덕이 오지 않는 한 대체로 불쾌해했다.

눈目

도설의 기분에 따라 눈을 내비칠 때가 가끔 있었다. 얼핏 비치는 눈의 색은 회청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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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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