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관절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요. ”

@yunga418 님 지원


잿빛이 약간 감도는 흰 머리카락. 굽실대는 잿빛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려 묶었다. 풀면 날갯죽지를 넉넉히 덮는 길이다. 피부는 기이하고도 맑은 흑색인데 곧바로 눈의 빛깔을 알아보지 못함은 그가 쓰고 있는 가면 때문이다. 이제 늘 입고 다니던 망토가 없으니 자유로이 머리뼈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높다란 뿔은 취향이라기보단 그때그때 바뀌는 종류다. 가면 안으로는 흰 천으로 눈을 가려놓고 있으며, 여전히 눈은 없다. 망토 대신 입은 그와 비슷하게 생긴 옷은 직접 바느질한 것으로 이전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새하얀 색이 란 것만이 다르다.
이전처럼 거친 뼈들의 모양은 줄고 양쪽 귀에 한 귀걸이와 손, 발, 그리고 척추를 감싼 각각의 손뼈, 발가락 뼈, 척추뼈만이 남았다. 훨씬 안정감 있고 간결한 모습이다.




환력


생의 그림자 (생영/牲影)
뼈만 남은 짐승을 불러들여 자신의 군대로써 부릴 수 있다.
이 뼈만 남은 군대는 땅에서 솟아올라 주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명령을 이행하는데, 섬세한 행동은 불가능하며 저 스스로의 이성이나 지성 또한 없어 대부분 직접 몸을 부딪히는 투박한 방식으로 마수에게 유효타를 가한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뼈를 활짝 열어 대상을 감싸는 등 누군가를 보호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호갑투를 낀 손가락으로 한정되는데, 이제 최대 열 구의 짐승 뼈를 움직일 수 있다.




보제


뼈의 갑주
손등을 감싸 뻗어 올라가는 열 개의 호갑투
많이 투박하고 위압감이 줄어든 생김새. 호갑투는 그 화려함이 줄고 그저 뼈의 모양을 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손가락에 끼는 것도 아니다. 손등을 감싸 뻗어 올라가는 열 개의 호갑투 (그것을 호갑투라고 할 수 있다면,)를 대표로 몸을 감싼 동물 뼈의 갑주가 보제에 속한다. 허나, 몸을 감싼 갑주도 이제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양 손과 발등, 그리고 등줄기로 이어진 척추뼈가 아니면 괴상할 정도로 많던 뼈들이 사라졌는데 귀에 매단 뼈로 된 귀걸이가 그것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소에는 귀걸이의 모양을 하다가 주인이 위험에 빠지면 갑주의 형태로 변해 몸을 감싼다.
여전히 꼭 끌어안는 형태로.




성격


[ 솔직한. 백색 선. 이단 ]
<솔직한>
여전히 솔직하다. 가치판단과 호불호, 누군가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 거침이 없고 그것이 제아무리 낯간지러운 말이건 냉정한 말이건 거리낌 없이 그냥 뱉고 만다. 감정 표현의 폭이 썩 넓지 않아 말로 대신하는 것인데 솔직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쉬이 믿어지지 않는 건 슬프다는 말을 할 때와 기쁘다는 말을 할 때에 표정이 모두 같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해하는 감정의 폭이 매우 좁다. 감정적인 부분을 배울 시기를 꽤 많이 놓쳐버린 이유가 크다. 표현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냥 표현하지 못한 대로 가슴에 묻는다. 허나, 웃는 일이 제법 늘어난 탓에 이전보다는 활기를 띤다.
<백색 선>
감정의 폭이 좁은 까닭에 모든 감정을 이해와 지식의 영역에 두고 있다. 또, 싫고 좋음에 있어 모든 것을 <느낌>, <기분>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싫다고 말해도 그것을 진심으로 멀리하진 않는다. 예를 들면 술은 싫다, 말해도 싫은 것은 제 느낌일 뿐이기 때문에 누군가 권하면 마시긴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백색의 선이 분명히 존재해서 객관적으로 여기기에 멀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호하게 마다하고는 한다. 문제가 있다면 본인도 어떤 것을 그리도 싫어하는지 잘 모른다. 밍숭맹숭하고 냉담하며 자기자신에게 굉장히 무디다.
<이단>
요즈음 생각하기를 제 본질과 근원을 배반하며,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끊임 없는 욕심과 존재의 본질이 거기 매여있다는 사실 자체, 현재의 나약한 상황 모두를 비관하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과 괴이는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해서, 괴이와 어울리는 일을 더 좋아하며 인간사는 방치하는 편이다. 신앙이란 그냥 거기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죽은 이들의 관만 지키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오해는 금물인 것이, 자체가 비관적인 성질을 띠게 된 것은 아니다. 그냥 인간과 선을 그은 것뿐이다. 근본에 <살아있는 이>를 위한 마음이 없음에 감사하고 있다.




기타


외관상 보여지는 나이는 대략 이십대 후반 정도.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하는데 곡옥을 사용하지 않고 보관 중인 까닭이다. 허나, 기운을 느끼는 힘은 조금 더 발달해서 이제 자세한 행동과 감정 상태도 일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모르쇠, 상황에 따라 보지 못한 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신앙의 축소로 힘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 이전에 비해 약간 말랐다. 원체 정적이고, 또 맥 없이 걷거나 움직이는 편이라 티는 잘 나지 않는다.
북방의 한기가 옅어지면서 대략 35년 전, 마을이 큰 산사태 피해를 입었다. 절벽산이라고는 해도 마을의 터는 흙 위에 잡았으므로 민가가 반 이상 망가지고, 인명 피해도 커 이 일을 계기로 마을은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산 초입 즈음에 기존보다도 더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신앙이 약해졌다. 이젠 시체를 땅에 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사를 위해 연 2회는 절벽을 오르고 있지만 그 풍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죽으면 자연히 신앙도 소멸할 것이라고, 무이 본인은 추측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을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그 본인이다.
신앙의 소멸에 별 생각이 없다. 여전히 운명론자고,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며 물어도 그저 ‘사는 게 나쁜가?’ 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아니면, ‘귀하 뜻대로 하시게.’
인근 마을과의 불화, 들짐승의 약탈 따위가 이전보다 잦아졌지만 인간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즈음 되니 죽은 이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즐거워져서, 오히려 말하지 않는 상대와 조잘거리는 걸 즐겼다.
예전에는 큰 충격을 받고는 하던 자살자를 봐도 반응이 없다. 안타깝지 않다기 보다는,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뿐이다.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마을 사람들도 현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신앙의 유지와 마을의 번성을 위해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끔 뼈들을 풀어 짐승이나 잡아주고, 타인을 위협하는 게 고작이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로 신경 쓰고, 오래 고뇌하는 것을 못 견디게 싫어한다.
황룡의 부름은 그래서 좋은 핑곗거리였다. 나라가 안팎으로 흉흉하니 너희를 사랑하여 나는 그에 힘을 보탤 것이다, 하는 의미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 무이가 지키는 것은 오직 관이고, 그건 마을이 망하고 없어져도 되는 것이며, 언젠가 시신은 모두 사라져 흙이 된다는 걸. 그러니, 이 의미도 모두. 언젠가는 끝이 나는 것이다. 언젠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