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신의 재난에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마시지요. ”


破片
파편
750세|180cm



그늘지고 축축한 숲속의 오래된 석상을 본 적 있다면, 여인을 마주할 때 그 장소의 눅눅한 습기를 떠올리기 쉽다. 암석 위로 칙칙한 색을 덧칠하는 이끼마저 희게 색 바란 것처럼, 그늘진 녹색을 띤 아홉갈래 흰 꼬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검은 치마 트임 사이로 아홉 꼬리가 하느작대는데, 긴 치맛자락보다도 풍성하게 흔들린다.
머리 위 전모를 덮은 검은 너울이 짙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여인은 제 얼굴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태도로, 너울을 걷어 올리는 순간이 없었다. 바닥을 스치도록 긴 치맛자락을 쥔 손은 희고 고운 여인의 것이지만, 느릿하게 걸어가는 도중이면 흰 털 짐승의 발이 보인다.
눅눅한 이끼의 색이 바랜 듯 희미한 색채, 가라앉는 검은 옷자락의 그늘. 그런 와중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휘감긴 금색 끈이 있다. 전모 위로, 옷을 묶은 허리끈, 양 손목, 손에 쥔 둥근 부채, 어쩌면 너울 아래의 머리 끈도 금색일지 모른다.
큰 키에 하늘하늘한 너울, 풍성한 옷자락, 흔들리는 긴 꼬리, 선명한 금색 매듭. 분명 눈에 들어오는 요소가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그 여인에게 시선을 오래 두는 사람이 없었다. 특유의 칙칙하고 축축한 습기 먹은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일까. 빗댄다면, 오래 방치되어 바스러지기 시작하는 석상을 닮은 존재.




환력


벽암 碧岩
본래 바위에 기원을 둔 존재답게 요력을 다루면 지면의 암석을 뜻대로 움직이나, 환력을 다루는 힘은 암석보다도 균열과 파괴에 가깝다.
암석 위에 푸르게 자란 이끼가 암석을 바스러트리는 것과 같다. 지면으로부터 쏘아낸 날카로운 암석으로 타격을 입힌 뒤, 타격 부위에서부터 자라나는 푸른 이끼로 뒤덮어 대상의 표면에 균열을 만들어 파괴한다.




보제


허리를 묶어 양 끝을 손목까지 묶고서도 길게 늘어지는 황금색 끈.
지닌 힘이 강해질 수록 길이가 길어진다. 살아온 긴 세월동안 묶인 매듭을 푸는 일이 없었다.




성격


・침묵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과묵하다. 본인이 필요하다 판단하지 않는 말을 쉽게 뱉는 경우가 없었고, 입을 연다 해도 되도록 말을 짧게 줄이고 했다. 행동 폭조차 넓지 않아 움직이는 소리마저도 없다는 착각을 준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으려 했고, 타인에게서 간섭받기 싫어한다.
・부동
어지간한 일에 동요하지 않아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상황 속에 서 있더라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어느 상황에서도 태도가 한결같으니 어쩌면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말없이 침묵하는 사람인데 태도조차 부동이니, 산 것이 아닌 사물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하며 거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책임
무뚝뚝한 태도에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보니, 매정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만 무정한 사람은 아니라서. 그 이유는 지나치다 싶은 정도의 책임감 때문이다. 책임 진 것을 외면하는 걸 부덕의 정점이라 여겨서,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에 쉽게 손 뻗지 못한다. 반대로 한 번 손 뻗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임을 지려고 하니, 여인의 성정이 강직하고 곧다는 걸 파악할 수 있는 일면이다.




기타


・기원
연청에서부터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바다 건너 명엽이 보이는 해안 가까이 있는 산에는 볕 들지 않도록 빽빽이 자란 침엽수 사이, 누군가 남기고 간 백암 조각상이 있었다. 열 갈래 꼬리 달린 여우를 닮은 조각상의 형형한 눈빛을 칠해둔 금색 도료가 삭아 떨어져 나가고, 눅눅하게 붙어 자란 이끼가 매끄러운 암석의 흰 표면을 덧칠하고, 장식으로 묶은 끈이 닳아 헤져 바람에 날아가버리고,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에 암석이 삭아 들어 꼬리 하나가 부서지도록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 조각상이 요괴로 화한 존재가 이 여인이다.
・행적
300년 전에 마수와 조우하여 상흔을 입고 환력을 얻었다 한다. 환력을 얻고서 있던 세 번의 부름을 모두 수락했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마수를 잡는 호중천으로서 동료들에게 협조할 줄 알았다.
100년에 한 번 있는 소집에 얼굴을 비출 뿐, 그 이외의 시간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싶은 정도로 조용하다. 다만, 들려오는 소문이 없다 뿐이지, 세상을 떠돌며 지내는 존재라 어딘가에서 마주치기 쉽기도 했다. 200년 전에는 학유의 눈길을 헤매고, 100년 전에는 초아 인근의 초원을 걸어가기도 했다. 이번 소집 이전에는 주역에 머물고 있었다.
환력을 얻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마땅히 들려오는 이야기가 없다. 세상을 떠돌며 방랑하는 것도 300년 전을 기점으로 시작한 것이라. 누군가 물어보아도 여상스러운 침묵으로 대답을 피한다.
・호
인간의 한 세대가 바뀔 시기마다 호를 바꿨다. 순서대로 균열 龜裂, 침잠 沈潛, 파각 破却, 파편 破片. 그다지 좋은 뜻을 가진 호가 아니다. 신앙을 얻기 싫어, 부르기 꺼림직한 것을 일부러 고른 모양.
・습관
상대를 부를 때에는 ~님이라 높여 호칭하고 차분하고 정중한 어휘를 사용하지만, 높낮이 없는 말투에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어 선을 긋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타인과 좁은 거리감이 영 불편해서, 손에 쥐고 다니는 둥근 부채는 손이 닿지 않도록 밀어내는 용도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몸에 묶고 두른 금색 끈을 만지는 습관이 있다. 매듭을 짓다가, 풀어내고, 다시 묶는 것처럼 조용히 손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기 쉽다.
・호불호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다. 말로는 무엇이든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무엇도 좋다 여기지 않으며 싫어할 이유조차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무뚝뚝하고 정적이며, 감정 기복조차 없다. 전형적인 재미없는 사람.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 섭취의 필요가 없기도 하고, 무언가를 섭취하는 걸 내켜 하지 않는다.
저 자신은 조용히 침묵하면서, 타인의 소란에 딱히 불호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저 자신만 홀로 고요하기를 원한다.

